
“지진, 쓰나미 이런 것만 재난이 아니라 우리 지금 상황이 재난 그 자체야”
2019년 우리 영화 『엑시트(Exit)』에 등장한 대사다. 취업에 목멘 청년 백수의 넋두리라 웃프지만, 이 말은 죽느냐 사느냐의 거대 재난 상황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영화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은 도시를 삼켜버린 재난에서 빌딩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이어지는 생존을 위한 고공 탈출 액션을 아찔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배우 조정석과 윤아는 배역과 하나가 돼 찌질함과 코믹함을 맛깔스럽게 살려냈다. 실제 상영시간 103분 내내 몰입감과 함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적절한 웃음거리를 만들어 낸다. 덕분에 영화는 누적관객 940만 명이라는 적지 않는 관객을 모아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엑시트』에서 눈여겨 볼 점 중 하나는 ‘일상 사물의 재발견’이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첨단 과학 무기가 아닌, 지하철 방독면, 쓰레기봉투, 종이박스, 덤벨, 휴대전화 등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거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생존 도구로 사용한다. ‘따따따 따~따~따~ 따따따’라는 SOS의 모스 부호를 휴대전화 불빛으로 표현하는 등 유용한 정보도 있다. 현실감 돋게 하는 이런 도구들과 방법은 실제 재난 발생 시 생존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영화는 ‘위기 시 등장하는 평범함의 필살기’를 담고 있다. 『엑시트』는 재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요원 대신 ‘찌질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남자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동안 취직 못해 눈칫밥 신세다. 외아들이지만 결혼도 못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용남이기에 엄마 칠순 잔칫날 누나들의 구박은 물론 사촌들에게도 무시당한다. 심지어 초등학생 조카도 한낮 공원에서 만난 백수 용남을 삼촌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한다.
유해화학물질 재난영화
여주인공 의주(윤아)는 이벤트 홀 부점장이지만, 하는 일은 알바생과 다를 바 없이 고되다. 거기에 마마보이에 이기적인, 그래서 왕싸가지인 점장(사장 아들)이 치근대는 것까지 퍽퍽한 직장생활을 보내고 있다. 단지 주인공 용남과 의주는 대학시절 암벽 등반훈련을 경험한 산악부였다는 게 특이하다. 이마저도 용남의 가족은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며 그를 힐난한다.
이상근 감독은 “『엑시트』는 인정받지 못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능이 위급 상황에서 필살기로 발현되면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백수 용남이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에 매달려 공중을 걸어 올라가는 고난위도 동작을 연속으로 보여 주는 것도 이런 감독의 의도가 깔려 있다.
영화 『엑시트』는 우리나라 영화에서 드물게 유해화학물질을 사고를 소재로 삼고 있다. 모 화학회사 창업주였던 이가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데 이어 수백억 원대 소송에서 패하자 분노를 참지 못해 그가 개발한 신종 화학물질을 유출시킨다. 수분 내 사망에 이르는 급성독성물질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와 안구에 화상을 입거나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나간다.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고, 생존자들은 옥상으로 대피한다. 구조 헬기로 사람들을 구조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독성 가스는 7~8층 건물 옥상까지 올라왔고, 계속 높아지고 있다. 구조 헬기 만석 탓에 남겨진 용남과 의주는 살기 위해 더 높은 빌딩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들은 극한 재난에서 출구(Exit)를 찾아 생존할 수 있을까?
『엑시트』는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가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소방대 구급대원들이 재난 구조를 위해 출동하지만, 독성가스가 무슨 성분인지 몰라 쩔쩔매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고립돼 구조를 요청하는 상황에서 왜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걸까? 실제 있었던 사고 사례를 보면 그 이유가 명징해 진다.
2012년 9월 경북 구미에서 불산이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5명이 사망하고 1만 명에 가까운 주민이 건강 피해를 입었다. 불산은 피부를 뚫고 인체에 흡수되는 성질이 강해 화학보호복 없인 절대 접근해선 안 되는 물질이다. 극미량으로도 뼈를 녹이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도 소방관이 출동했는데, 화학보호복 없이 일반 방화복과 마스크만 착용했다가 피해를 당했다. 또 불산 확산 방지를 위해 물을 뿌렸는데, 이게 독이 됐다. 불산(F)이 대량으로 유출됐을 때 물(H2O)을 만나면 불화수소(HF)로 변하고, 이 불화수소가 공기 중 수증기와 만나면 인체에 치명적인 불화수소산으로 변한다. 즉 유출된 화학물질의 성질을 모르면 오히려 피해가 가중된다. 영화에서 소방대원이 대책 마련을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화학물질 사고는 얼마나 일어나는 걸까? 우리나라 화학 산업은 2013년 162.7조 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12만 명이 종사하는 생산규모 세계 5위의 기간산업이다. 그만큼 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2012년 이후부터 공식 신고된 국내 화학물질 사고가 해마다 100여 건을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신고되지 않은 사고까지 감안하면 하루나 이틀 사이에 크고 작은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 꼴이다. 영화 『엑시트』는 이런 점들을 기본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구미 불산 누출 사건과 달리 영화 『엑시트』에선 다행스럽게도 급성독성을 지닌 유해화학물질 중화제로 물이 효과적이란 걸 우연히 확인하게 되면서 수습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에서 벌어진 상황이 현실이 된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엑시트』가 현실이 된다면?
최근 화학물질은 잔류성(Persistence), 생물농축성(Bioaccumulation), 독성(Toxicity), 즉 PBT를 함께 평가한다. 화학물질의 농도가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는 반감기가 물에서 2개월, 토양에서 6개월 이상이면 잔류성 물질로 보는데, 환경 중에 계속 잔류하면 그만큼 사람과 생태계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나라에서 1979년 사용이 금지된 DDT가 2017년 경북지역 달걀에서 검출됐고, 절연유로 사용되던 PCBs가 북극 지역에서 검출되는 것도 이러한 잔류성 때문이다. 생물농축성은 화학물질이 생물 체내에 쌓여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만약 영화 속 재난이 실제 발생했다면, 이러한 성질 때문에 재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닐지 모른다. 실제 1984년 인도 보팔 독성 가스 유출 참사 이후 인도의료연구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참사 10년이 지난 1994년까지 2만5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생존자는 암, 시각 장애와 같은 후유증에 시달렸고, 유전적 질환으로 피해자들의 2세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이동수·이수경·김찬국·장영기. 2019. 『매일매일 유해화학물질』).
2016년 국내에 개봉된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m)』은 독특한 소재의 영화다. 지난 5월 JTBC ‘방구석1열’이란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SF 영화의 정수’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영화는 『그래비티』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으로, 영국의 소설가 P.D. 제임스가 1992년 발간한 동명의 원작을 각색해 2006년에 영화화했다. 『칠드런 오브 맨』은 가까운 미래 전 세계적으로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재생이 불가능한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종 자체의 멸종에 처하고, 권력집단과 반군세력은 권력 유지와 쟁취를 위해 생식능력 있는 정자를 지닌 남자와 임신 가능한 여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원작이나 영화 모두 왜 인류가 불임이 됐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제임스가 원작을 쓰던 1990년대엔 야생동물의 개체 수 급감과 생식 관련 이상 행동에 대해 유해화학물질 원인설이 제기되던 시기였고 이는 대부분 사실로 증명됐다. 전 세계적으로 급성독성을 지닌 화학물질 사용은 금지되고 있지만, 잔류성과 생물농축성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유해화학물질 중에는 암을 유발하거나 내분비계장애물질, 즉 환경호르몬으로 작용하는 것이 많다. 환경호르몬은 남성 정자 수 감소와 여성 불임 등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칠드런 오브 맨』에서 그려지는 재생 불가능한 사회의 주요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다시 『엑시트』로 돌아가 보자. 지진, 쓰나미, 대형화재 등 전통적인 재난 소재로 국내에서 영화화된 사례가 있다. 얼마 전에는 핵발전소 사고에 따른 재난을 그린 영화도 있었다. 해외에선 혜성 충돌, 외계 또는 심해 괴 생명체가 등장하는 SF 재난 영화도 있었다. 그럼에도 감독은 왜 유해화학물질을 영화의 핵심 소재로 삼았을까?
영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예술이다. 1980년대 전 세계적으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창궐하자 피에 대한 근원적 공포가 일어나고, 이를 바탕으로 한물갔다고 평가됐던 ‘드라큘라’가 재등장했던 것처럼 영화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언론에 화학물질(Chemical)과 혐오(Phobia)의 합성어인 케모포비아(chemophobia)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던 건 2016년 5월경이었다. 2016년은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인해, 안전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해 왔던 생활화학용품에 대한 공포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즉 생활 속 유해화학물질이 지진, 쓰나미 못지않은 재난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고, 2019년 10월 11일 기준 1206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습기살규제 참사는 이러한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영화 『엑시트』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시작된 케모포비아 사회를 반영한 작품이다.
강찬호 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전과 이후 대한민국은 달라져야 한다”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국민이 자신들의 삶을 보호받고 살아가는 안전한 나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안종주. 2016. 『빼앗긴 숨』). 케모포비아 사회는 결국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지진, 쓰나미 이런 것만 재난이 아니라 우리 지금 상황이 재난 그 자체야”
2019년 우리 영화 『엑시트(Exit)』에 등장한 대사다. 취업에 목멘 청년 백수의 넋두리라 웃프지만, 이 말은 죽느냐 사느냐의 거대 재난 상황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영화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은 도시를 삼켜버린 재난에서 빌딩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이어지는 생존을 위한 고공 탈출 액션을 아찔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배우 조정석과 윤아는 배역과 하나가 돼 찌질함과 코믹함을 맛깔스럽게 살려냈다. 실제 상영시간 103분 내내 몰입감과 함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적절한 웃음거리를 만들어 낸다. 덕분에 영화는 누적관객 940만 명이라는 적지 않는 관객을 모아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엑시트』에서 눈여겨 볼 점 중 하나는 ‘일상 사물의 재발견’이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첨단 과학 무기가 아닌, 지하철 방독면, 쓰레기봉투, 종이박스, 덤벨, 휴대전화 등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거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생존 도구로 사용한다. ‘따따따 따~따~따~ 따따따’라는 SOS의 모스 부호를 휴대전화 불빛으로 표현하는 등 유용한 정보도 있다. 현실감 돋게 하는 이런 도구들과 방법은 실제 재난 발생 시 생존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영화는 ‘위기 시 등장하는 평범함의 필살기’를 담고 있다. 『엑시트』는 재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요원 대신 ‘찌질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남자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동안 취직 못해 눈칫밥 신세다. 외아들이지만 결혼도 못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용남이기에 엄마 칠순 잔칫날 누나들의 구박은 물론 사촌들에게도 무시당한다. 심지어 초등학생 조카도 한낮 공원에서 만난 백수 용남을 삼촌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한다.
유해화학물질 재난영화
여주인공 의주(윤아)는 이벤트 홀 부점장이지만, 하는 일은 알바생과 다를 바 없이 고되다. 거기에 마마보이에 이기적인, 그래서 왕싸가지인 점장(사장 아들)이 치근대는 것까지 퍽퍽한 직장생활을 보내고 있다. 단지 주인공 용남과 의주는 대학시절 암벽 등반훈련을 경험한 산악부였다는 게 특이하다. 이마저도 용남의 가족은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며 그를 힐난한다.
이상근 감독은 “『엑시트』는 인정받지 못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능이 위급 상황에서 필살기로 발현되면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백수 용남이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에 매달려 공중을 걸어 올라가는 고난위도 동작을 연속으로 보여 주는 것도 이런 감독의 의도가 깔려 있다.
영화 『엑시트』는 우리나라 영화에서 드물게 유해화학물질을 사고를 소재로 삼고 있다. 모 화학회사 창업주였던 이가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데 이어 수백억 원대 소송에서 패하자 분노를 참지 못해 그가 개발한 신종 화학물질을 유출시킨다. 수분 내 사망에 이르는 급성독성물질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와 안구에 화상을 입거나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나간다.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고, 생존자들은 옥상으로 대피한다. 구조 헬기로 사람들을 구조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독성 가스는 7~8층 건물 옥상까지 올라왔고, 계속 높아지고 있다. 구조 헬기 만석 탓에 남겨진 용남과 의주는 살기 위해 더 높은 빌딩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들은 극한 재난에서 출구(Exit)를 찾아 생존할 수 있을까?
『엑시트』는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가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소방대 구급대원들이 재난 구조를 위해 출동하지만, 독성가스가 무슨 성분인지 몰라 쩔쩔매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고립돼 구조를 요청하는 상황에서 왜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걸까? 실제 있었던 사고 사례를 보면 그 이유가 명징해 진다.
2012년 9월 경북 구미에서 불산이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5명이 사망하고 1만 명에 가까운 주민이 건강 피해를 입었다. 불산은 피부를 뚫고 인체에 흡수되는 성질이 강해 화학보호복 없인 절대 접근해선 안 되는 물질이다. 극미량으로도 뼈를 녹이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도 소방관이 출동했는데, 화학보호복 없이 일반 방화복과 마스크만 착용했다가 피해를 당했다. 또 불산 확산 방지를 위해 물을 뿌렸는데, 이게 독이 됐다. 불산(F)이 대량으로 유출됐을 때 물(H2O)을 만나면 불화수소(HF)로 변하고, 이 불화수소가 공기 중 수증기와 만나면 인체에 치명적인 불화수소산으로 변한다. 즉 유출된 화학물질의 성질을 모르면 오히려 피해가 가중된다. 영화에서 소방대원이 대책 마련을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화학물질 사고는 얼마나 일어나는 걸까? 우리나라 화학 산업은 2013년 162.7조 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12만 명이 종사하는 생산규모 세계 5위의 기간산업이다. 그만큼 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2012년 이후부터 공식 신고된 국내 화학물질 사고가 해마다 100여 건을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신고되지 않은 사고까지 감안하면 하루나 이틀 사이에 크고 작은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 꼴이다. 영화 『엑시트』는 이런 점들을 기본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구미 불산 누출 사건과 달리 영화 『엑시트』에선 다행스럽게도 급성독성을 지닌 유해화학물질 중화제로 물이 효과적이란 걸 우연히 확인하게 되면서 수습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에서 벌어진 상황이 현실이 된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엑시트』가 현실이 된다면?
최근 화학물질은 잔류성(Persistence), 생물농축성(Bioaccumulation), 독성(Toxicity), 즉 PBT를 함께 평가한다. 화학물질의 농도가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는 반감기가 물에서 2개월, 토양에서 6개월 이상이면 잔류성 물질로 보는데, 환경 중에 계속 잔류하면 그만큼 사람과 생태계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나라에서 1979년 사용이 금지된 DDT가 2017년 경북지역 달걀에서 검출됐고, 절연유로 사용되던 PCBs가 북극 지역에서 검출되는 것도 이러한 잔류성 때문이다. 생물농축성은 화학물질이 생물 체내에 쌓여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만약 영화 속 재난이 실제 발생했다면, 이러한 성질 때문에 재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닐지 모른다. 실제 1984년 인도 보팔 독성 가스 유출 참사 이후 인도의료연구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참사 10년이 지난 1994년까지 2만5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생존자는 암, 시각 장애와 같은 후유증에 시달렸고, 유전적 질환으로 피해자들의 2세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이동수·이수경·김찬국·장영기. 2019. 『매일매일 유해화학물질』).
2016년 국내에 개봉된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m)』은 독특한 소재의 영화다. 지난 5월 JTBC ‘방구석1열’이란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SF 영화의 정수’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영화는 『그래비티』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으로, 영국의 소설가 P.D. 제임스가 1992년 발간한 동명의 원작을 각색해 2006년에 영화화했다. 『칠드런 오브 맨』은 가까운 미래 전 세계적으로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재생이 불가능한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종 자체의 멸종에 처하고, 권력집단과 반군세력은 권력 유지와 쟁취를 위해 생식능력 있는 정자를 지닌 남자와 임신 가능한 여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원작이나 영화 모두 왜 인류가 불임이 됐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제임스가 원작을 쓰던 1990년대엔 야생동물의 개체 수 급감과 생식 관련 이상 행동에 대해 유해화학물질 원인설이 제기되던 시기였고 이는 대부분 사실로 증명됐다. 전 세계적으로 급성독성을 지닌 화학물질 사용은 금지되고 있지만, 잔류성과 생물농축성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유해화학물질 중에는 암을 유발하거나 내분비계장애물질, 즉 환경호르몬으로 작용하는 것이 많다. 환경호르몬은 남성 정자 수 감소와 여성 불임 등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칠드런 오브 맨』에서 그려지는 재생 불가능한 사회의 주요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다시 『엑시트』로 돌아가 보자. 지진, 쓰나미, 대형화재 등 전통적인 재난 소재로 국내에서 영화화된 사례가 있다. 얼마 전에는 핵발전소 사고에 따른 재난을 그린 영화도 있었다. 해외에선 혜성 충돌, 외계 또는 심해 괴 생명체가 등장하는 SF 재난 영화도 있었다. 그럼에도 감독은 왜 유해화학물질을 영화의 핵심 소재로 삼았을까?
영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예술이다. 1980년대 전 세계적으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창궐하자 피에 대한 근원적 공포가 일어나고, 이를 바탕으로 한물갔다고 평가됐던 ‘드라큘라’가 재등장했던 것처럼 영화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언론에 화학물질(Chemical)과 혐오(Phobia)의 합성어인 케모포비아(chemophobia)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던 건 2016년 5월경이었다. 2016년은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인해, 안전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해 왔던 생활화학용품에 대한 공포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즉 생활 속 유해화학물질이 지진, 쓰나미 못지않은 재난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고, 2019년 10월 11일 기준 1206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습기살규제 참사는 이러한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영화 『엑시트』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시작된 케모포비아 사회를 반영한 작품이다.
강찬호 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전과 이후 대한민국은 달라져야 한다”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국민이 자신들의 삶을 보호받고 살아가는 안전한 나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안종주. 2016. 『빼앗긴 숨』). 케모포비아 사회는 결국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